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침공 (문단 편집) === A집단군의 아르덴 공세 === 5월 10일 A집단군의 진격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당일 정오까지 선두의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은 벨기에군과 교전을 시작했지만 뒤따르던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은 막 라인 강을 도하하고 있었고, 그 2제대는 이미 작전 계획 시간에서 10시간이나 지체하고 있던 제1제대의 후미와 뒤섞이고 있었다. 5월 11일 독일군은 여전히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교통 정체에 고통받고 있었다. 적습에 대한 오보와 연합군이 도로에 부설한 [[지뢰]]를 비롯한 숱한 장애물은 진격을 더욱 지체시켰다. 여기에 기갑사단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보병사단들이 기갑사단의 예정된 진격로에 끼어들며 상황은 더욱 난장판이 되버렸다. 때문에 라인하르트 군단은 진격은 커녕 이틀 동안이나 독일 국내에 갇혀 있게 된다. 5월 13일 마침내 국경은 넘었지만 양익대형으로 전환하려는 순간 6보병군단이 라인하르트 군단의 진격로에 차량들을 들이밀어 버리고 발끈한 라인하르트 군단이 무작정 부대를 밀어붙임으로써 끔찍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공세를 취해야 할 사단 전체가 뿔뿔히 흩어지고 예하부대들의 위치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독일군의 정체는 마스 강에서부터 라인 강변에 이르기까지 '''250km'''에 달하는 장대한 구간으로 확대되었다.[* 아이러니지만 이런 상황은 1944년 [[아르덴 대공세]] 때도 발생했으며, 여기서 독일군은 사실상 좌절하고 만다. 차이점이라면 1940년은 차량이고 병력이고 너무 많아서 막혔던 것이고, 1944년엔 병력 수는 비교적 적당했지만 차량이 너무 무거워서 도로가 작살나고, 낮에는 연합군 전폭기들에게 사냥당하고, 결정적으로 연료가 없었다.] [[전격전]]이란 단어가 만들어진 전쟁에 걸맞지 못한 이런 추태는 어떻게 프랑스 침공이 대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만든다. 그 요인은 독일군 상부의 작전 착오에도 불구하고 [[임무형 지휘체계]]에 충실한 일선의 중하급 지휘관들의 분투 덕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적'도 따라붙었다. 독일군이 스스로가 만든 재앙에 짓눌려 있던 동안 이들을 제압할 연합군의 공군기들이 단 1대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야간에 아르덴 숲을 정찰한 프랑스 정찰기가 전차와 트럭으로 뒤엉킨 채 끝없는 빛의 띠로 이어지는 독일군의 교통정체를 발견하고 급히 상부에 보고했으나 '날이 밝으면 다시 확인해 보라'라는 맥빠진 답만 돌아왔을 정도였다. 애초에 프랑스군 수뇌부는 아르덴 돌파를 쥘 베른의 소설에서나 가능한 상상력의 산물이라 여겼다.] 이는 프랑스군이 독일 공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공군 자산을 대서양 방면의 후방기지에 집중 배치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니 안 그래도 항속 거리가 짧은 프랑스 군용기들이 적기에 전선을 지원할 수 있을리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상술했듯 프랑스는 장기전, 소모전이 기본 방침이었고, 항공기 생산과 조종사 교육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공군력은 최대한 온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프랑스는 독일 공군이 엄청난 공업력에 기반한 대규모 공군이라고 생각했다. [* "독일 공군은 1만 대 이상의 전술기를 보유하고 있다"라고 운운하는 등 실제 규모의 3배 이상으로 판단했다는 징후가 당시 항공 기술 관련 언론 보도에서 종종 보인다.] 이런 사정은 영국도 비슷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전술적 목표에 대한 공군 지원 요청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설령 전방에 공군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해도 전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